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홍성흡 옮김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세계의 면모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 곳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우물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읽고 있는 여러분도 다양한 크기의 우물 속 세상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우물속에서 그 세계의 전부를 배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물안 개구리우물안에서도 하늘은 맑구나(by 구글이미지 검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물은 대의 민주주의와 신자본주의, 과학 중심 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의 신화라고 할 수 있죠. 소비에트 연방의 거대한 실험이 실패로 끝난 후, 더 이상 적수를 찾을 수 없게 된 이 우물은 그 자체가 세계 전체인 양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찰력의 힘으로 그 우물을 꿰뚫어 그 바깥을 바라보는 소수의 인물들은 이 세계가 전부가 아니며, 바깥 세상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경종을 울립니다.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를 쓴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남아메리카의 원주민 사회의 정치 체계를 연구하면서 그러한 통찰을 얻은 것 같습니다. 이 책은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10여년 간 쓴 11편의 논문을 다시 엮은 것입니다. 냉전과 오일 쇼크, 베트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자는 아마도 서구 중심 주의의 한계를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래서인지, 책의 곳곳에서 서구 중심주의와 단선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폭력이 없는 권력을 상상할 수 없는 우리에게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생활과 추장의 역할을 소개함으로써 폭력이 없는 권력, 그리고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은 정치체계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서구의 지식인들이 원주민의 경제 형태를 ‘생계경제’라 부르면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는 미개한 경제 구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수렵채집민 집단이 역사 최초의 풍요사회를 이루었고 노동 시간은 하루 1~2시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그들의 서구 중심주의적인 시각이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저도 서구 중심주의 세계관에 의해 자라나 그것만이 옳은 것인 줄로 알던 것을 벗어난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연구를 따라가보면, 원주민 사회는 정치적으로는 권력의 집중을 극도로 억제하는 사회입니다. 추장 제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소왕국의 왕도 아니고, 마을 이장도 아닙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 사회는 추장에게 말할 권리와 많은 부인을 얻을 권리를 줍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추장은 강한 권력을 가진 것 같지만, 실제로 그가 말하는 언어는 항상 같은 내용이며 그 언어로 하는 주된 행위를 꼽으라면 분쟁의 중재 정도입니다. 또한 추장은 그 사회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인데 그 이유는 그의 관대함을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선물 주기를 지속하기 위함입니다. 다만 전쟁 시에는 추장의 권위가 강해지는데, 전쟁이 끝나면 추장의 권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추장이 강한 권위를 지속하려면 결국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데, 추장만이 원하는 전쟁은 추장의 권위를 오히려 더욱 떨어뜨리게 됩니다. 이것은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권력을 통하여 움직임으로써 소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뿌리부터 경계한 원주민들이 탄생시킨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계층화는 이런 방면에서는 오류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아메리카 원주민의 공동 가옥인 말로카와 그 집성촌을 국가가 되기 전 단계로, 또 추장을 한 국가의 왕이 되기 직전의 소왕으로 인식하는 것은 서구 중심의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서구의 민족학자들은 아메리카의 원주민의 문화와 인구를 과소 평가하였고, 경제학자들은 그들의 경제를 원시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종교인들은 그들의 신을 무시해왔습니다. 색안경이 사물을 원래와는 달리 왜곡된 색으로 보이게 하는 것처럼  이렇게 서구를 중심에 놓고 본 원주민 사회는 미개한 사회일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비전문가들도 이런 왜곡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과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오류가 있었습니다.(아직까지도 존재하죠) 원숭이가 진화하면 인간이 된다고 잘못 생각한 사람들은 아메바 -> 양서류 -> (생략) -> 원숭이 -> 인간의 과정으로 진화를 하며 인간이 가장 고등하게 진화한 생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원숭이는 원숭이 그 자체로 지구 생태계에 완벽하게 적응한 동물입니다. 인간과는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을 뿐이며, 앞으로도 인간으로 진화할 일은 없습니다.


    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한 것은 아니야원숭이가 인간으로 진화한 것은 아니야(image from : schoolbag.info/biology/living/174.html)



    이런 줄세우기의 오류는 현재에도 사회, 경제, 문화, 의료와 같은 여러 분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오류로 왜곡된 현상을 실제로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왜곡된 실제는 하나의 신화가 되어 더 많은 편견과 차별의 뿌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도 한번씩은 스스로가 보는 현실이 왜곡된 것이 아닌지 따져보는 회의주의자로 살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피에르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Image from: gabriellagiudici.it)



    ps1. 저자 피에르 클라스트에 관한 나무위키 [링크]

    ps2. 책 첫머리에 나오는 정치와 권력 현상이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라피에르의 주장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동물들의 권력 투쟁에 대한 예가 있거든요. [링크] 그래서 권력과 억압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크게 공감을 하지만, 그 바탕에는 생물학적인 면이 존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Posted by 한의학박사 & 한방내과 전문의 김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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